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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동아시아를 바라보는 서구 지성인의 프리즘 제33차 KF 포럼, 에즈라 보겔 하버드대 명예교수 강연 지난 3월 16일 제33차 KF 포럼이 서울 플라자 호텔에서 열렸다. 이번 포럼에는 미국의 원로 학자로 동아시아 분야의 세계적 석학인 에즈라 보겔 하버드대 명예교수(80)가 ‘한국과 중국, 1978~1979: 발전의 전환점’이라는 주제로 열정적인 강연을 펼쳐 많은 이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동아시아 분야의 최고 전문가, 에즈라 보겔

에즈라 보겔 하버드대 명예교수. 오랜만에 들어보는 이름이다. 미국 학계에서 최고의 동아시아 전문가로 꼽히는 그의 저작들은 서구 지성인들이 현대 동아시아를 바라보는 프리즘을 제공해왔다. 그는 1958년 하버드대에서 사회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한때 미국의 적국이었던 일본으로 건너가 2년간 일본어를 배우면서 중산층 가정을 직접 방문하여 가족 구성원들을 인터뷰했다. 발로 뛰어 얻은 그의 연구는 1963년 발간한 『일본의 신(新)중산층』에 담겼다. 그의 명성은 1979년 『일등 국가로서의 일본(Japan as No. 1): 미국을 위한 교훈』을 펴내면서부터 빛을 발했다. 일본 경제 발전 모델을 높이 평가한 이 저서는 서구에서 일본 배우기 붐을 일으켰다.
1987년에는 8개월 동안 중국에 체류하면서 중국 경제의 개혁 과정에 대한 연구에 몰두했다. 일본과 중국에서부터 시작된 동아시아 연구는 한국으로 이어졌다. 1965년 한국을 처음 방문한 이후 여러 차례 한국을 다녀갔으며 1972년부터 하버드대 동아시아 연구소장으로 있으면서 많은 한국인 제자들도 길러냈다. 1991년 발간한 『네 마리의 작은 용(The Four Little Dragons): 동아시아에서의 산업화의 확산』이라는 저서에서는 유교 윤리가 접목된 동양식 자본주의 정신이 아시아 경제 발전의 원동력이 됐다는 이론을 주창해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박정희와 덩샤오핑의 리더십에 관해 다룬
심도 깊은 강연
에즈라 보겔 명예교수는 한국국제교류재단이 추최하는 이번 제33차 KF 포럼에서 ‘한국과 중국, 1978~1979:

에즈라 보겔 하버드대 명예교수 강연 이미지발전의 전환점’이라는 주제 강연을 통해 박정희 대통령과 덩샤오핑(鄧小平)의 리더십을 비교했다. 박정희(朴正熙) 전 대통령과 덩샤오핑 전 주석. 두 사람은 격동기에 국가의 최고 지도자였으며 한국과 중국 경제 발전의 기틀을 마련한 인물이라는 점에서 서로 닮았다. 박 전 대통령은 한국 근대화의 토대를 마련했고, 덩샤오핑은 항일전쟁과 문화혁명 등 격동기를 거치며 오늘날 ‘G2’로 성장한 경제 대국 중국을 있게 한 주인공이다.
반면 박 전 대통령은 눈부신 경제적 업적 이면에 독재와 장기 집권이라는 그늘이 있고, 덩샤오핑 전 주석은 1989년 톈안먼(天安門) 사태 당시 민주화 운동을 무력으로 짓밟은 전력이 있다. 보겔 교수는 “덩샤오핑이 중국을 문화혁명의 혼란에서 구해내 경제 대국으로 탈바꿈하게 만든 것처럼, 박정희가 없었더라면 오늘날의 한국도 없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한국과 중국은 다른 방식을 택했다”고 평가했다.

그의 강연을 간략하게 요약해 정리해본다.

동아시아 분야의 최고 전문가, 에즈라 보겔

20세기에 세계에서 일어난 가장 큰 변화 중 하나가 바로 1978년 이후 중국의 변화다. 그 변화는 1978년 12월 덩샤오핑의 집권과 함께 시작됐다. 덩샤오핑은 아주 경험이 풍부한 리더였다. 집권하기 전 경제 정책과 외교정책을 폭넓게 다뤄봤다.
덩샤오핑은 1949년부터 1952년까지 중국 남서부 지방에서 지방 행정을 맡았고, 1966년부터 1976년까지 당비서를 지냈다. 5년간 프랑스에서 유학했으며 구 소련에서 군복무를 한 경험도 있다. 머리가 뛰어나고 전략적이며, 추진력도 갖추었다.
덩샤오핑은 한국이 일본과 외교관계 수립 후 일본으로부터 받은 차관을 경제 발전에 활용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는 사절단을 해외에 파견했고, 1978년에만 세 차례나 직접 해외 순방길에 나섰다. 1972년 미국과수교 후 미국을 방문했을 때는 카우보이 복장으로 말을 탄 채 사진을 찍기도 했다. 이는 중국인들에게 미국문화를 소비해도 된다는 메시지였으며, 과거의 공산 지도자 이미지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덩샤오핑은 일왕(日王)을 만난 최초의 중국인이기도 했다. 그는 일본과 지속 가능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여러 방법을 동원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반일 감정을 잠시 양보한 채 1978년 대일본 문화개방을 단행했다. 그의 문화 개방 정책은 중국의 전후 세대가 일본을 이해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1978년 12월 제3차 중국공산당대회에서 덩샤오핑은 개혁 개방의 선언과 함께 흑묘백묘론(黑猫白描論)을 주창하며 이념보다 실용을 앞세우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흑묘백묘론은 경제를 발전시킬 수 있다면 공산주의 계획경제가 아닌 다른 경제 시스템도 용인할 수 있다는 발상의 대전환이었다. 그는 출신 성분에 관계없이 행정고시에 합격하면 공직 진출이 가능한 능력 중심의 인사 정책을 추진했고 겉으로는 마오쩌둥(毛澤東)을 우상화하면서도 정치에서는 분리 정책을 펴나갔다. 마오쩌둥의 추종자들이 반감을 갖지 않도록 톈안먼 광장에 대형 마오쩌둥 동상을 세우고 우상화하도록 함으로써 정치적 갈등을 미연에 방지했다. 한편 문화혁명을 주도했던 홍위병들에 대해서도 과거의 과오는 지적하되 깊이 파고들어 단죄하는 것은 피하자는 미래지향적 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그는 한국과의 관계 증진에는 관심이 없었다. 북한과의 관계를 고려했기 때문이었다. 그에게는 오랜 혈맹인 북한과의 관계가 훨씬 중요했으며, 김일성이 소련과 가까워지는 것을 막으려는 의도도 있었다. 덩샤오핑은 국가의 통합이라는 큰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었다. 덩샤오핑은 대외 개방과 권력의 지방 이양을 추진하면서도 마오의 이념을 유지하고 정치적 반대세력을 무마하는 방식으로 경제성장을 이끌어냈다.

고위험(高危險)의 모험을 감행한 독특한 리더십, 박정희

반면 박정희 전 대통령은 막대한 외자 유치와 관료들 간의 경쟁을 조장하는 방식을 선택했다. 그리고 중화학공업 육성과 수출 증진 정책은 큰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1972년 일본의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을 벤치마킹 한 ‘시월유신’ 이후 그는 한국을 철저하게 통제된 경찰국가로 만들었다. 이러한 그의 정책은 많은 지식인들의 반감을 샀고 결국 1979년 10월 측근에게 암살당하고 말았다.
독재적인 리더십은 잔혹하지만, 때로는 나라를 위해서 결국 좋은 쪽으로 결과를 맺을 때가 있다. 박정희는 북한의 위협과 미국의 불확실한 지원, 경제 발전 기반이 전무한 상태에서 한국 근대화를 이루기 위해 노력했다.그는 헌신적이었고, 개인적으로 착복하지 않았으며, 무엇보다도 대단한 모험가였다. 박 전 대통령 재임 기간(1962~1979년) 동안 1인당 국민총생산(GNP)은 83달러에서 1,640달러로 증가했다. 최빈국에 속했던 한국을 단숨에 신흥 공업국 반열에 올려놓았다. 박정희 모델은 보통 사람 같으면 할 수도 없고 하지도 않을 고위험의 모험을 감행한 그의 독특한 리더십의 소산이다.

대지진이 일본과 주변 정세에 미친 영향

강연이 끝난 뒤 이어진 질의 응답 시간과 별도로 마련된 언론 인터뷰에서는 최근 발생한 동일본 대지진과 관련된 질문이 쏟아졌다. 보겔 교수는 1979년 『일등 국가 일본』을 쓴 데 이어, 1986년 <포린 어페어스(Foreign Affairs)>지 에 ‘팍스 니포니카(Pax Niponica)’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1990년대 들어 일본 경제의 거품이 꺼지고 기나긴 경기 침체의 터널에 들어서기 전까지 미국에서는 일본식 종신 고용과 가족형 기업 경영이 기업의 부가가치를 극대화하는 새로운 경영 기법으로 떠받들어졌다. 다음은 인터뷰의 주요 내용 중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에즈라 보겔 하버드대 명예교수 강연 이미지- 동일본 대지진이 주변국과의 관계에 미칠 영향에 대해 설명해달라.
“매년 200만 명의 한국인이 일본을 방문하는 등 인적 교류가 매우 활발하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한국처럼 일본을 잘 아는 나라도 없다. 이런 한국이 매우 신속하게 일본을 지원하고 나선 것은 잘한 일이며 앞으로 한일 관계에 상당히 긍정적인 결과를 불러올 것으로 본다. 한국은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에 뒤처졌고, 근대화 과정에서도 한발 뒤였다. 그런데 지금 한국이 일본에 도움을 주고 있다. 이는 심리적으로도 상당한 의미를 지닌다. 한일 관계에 대해 낙관한다. 한편 이번 지진은 중국인들 사이에서 일본에 대한 동정 여론이 확산되는 계기는 될 것이다. 중국에서 1990년대 이후 민족주의 정서를 간직한 세대의 동정심도 이끌어낼 수 있어 중일 관계 증진에도 긍정적인 역할을 할 것으로 내다본다.”

- 일본이 국내총생산(GDP) 2위 자리를 중국에 내준 상황에서 이번 지진이 터졌다. 향후 중일 관계를 어떻게 보는가?
“문제는 중국이 정말로 세계 2위의 경제 대국인가 하는 점이다. 세계 경제 순위를 매기는 데는 여러 가지 다른 방법이 있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중국의 자신감이 커졌다는 점이다. 중국이 다시 아시아 대륙의 강국으로 떠오르면서 중국에 대항하는(resist) 움직임과 경향이 나타날 것이다. 우리는 중국에 ‘당신들이 너무 강하게 밀어붙인다면 저항할 것이지만, 친구로서 협력하는 사이가 되고 싶다’라는 메시지를 던져야 한다. 덩샤오핑은 ‘일본은 우리의 적’이라고 생각했던 많은 중국인과는 달리 일본과도 좋은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 일본 총리가 지난 4년간 다섯 번 교체될 정도로 일본의 리더십은 불안하다. 이번 지진이 보다 강한 리더십을 요구하는 계기가 될 가능성은?
“일본의 관료 체제는 굳건하며 저력이 있다. 이번 지진을 극복하는 데 원동력이 될 것이다. 그러나 탄탄한 관료 사회도 강력한 정치적 리더십이 뒷받침돼야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 일본이 1990년대 성장이 정체된 이른바 ‘잃어버린 10년’을 겪었던 원인은 정치와 경제, 관료체제는 굳건하지만 정치인의 강력한 리더십이 부족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중국에서는 성장이 저하되면 정치인들이 권력을 상실할까 두려워하는데 일본은 그렇지 않다. 지나치게 공고한 관료제는 대응에 더딘 측면이 있다. 일본의 리더십이 너무 약하다는 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공산권 몰락 이후 일본에선 자민당이라는 하나의 거대 정당만 남았다. 자민당 내 계파들은 서로 협력할 필요가 없어졌다. 이후 그들은 한 번도 하나의 세력으로 뭉친 적이 없다. 모두 흩어져 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근본적 변화란 쉽지 않다. 일본에도 대통령제(presidential system)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현재 일본은 강력한 리더가 필요하다.”

에즈라 보겔=▲1930년 7월생 ▲1958년 하버드대 사회학 박사 ▲1964~2000년 하버드대 교수 ▲1972~1977년 하버드대 동아시아 연구센터 소장 ▲1995~1999년 페어뱅크 연구소장

김세원 고려대학교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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